국가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유산은 인도에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여러 박물관과 기념관부터 간디지의 아슈람까지, 지도자의 위대한 삶을 증언하는 다양한 스톱오버가 있다. 그의 진실과 비폭력에 대한 철학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바쳐진 다양한 기념물들을 방문함으로써 그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간디지의 인류발전에 대한 공헌은 너무 크고 다양해서 잊혀지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그를 인류가 실현한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사회 혁신가로 인식한다.

인도 - 간디의 나라
1915년부터 1948년까지, 마하트마 간디는 혁명의 불길에 불을 지피고 나라를 통일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유 투쟁 중 하나로 만들었다. 오늘날, 그는 국가의 자유 역사에서 키 큰 인물로 우뚝 서 있으며, 그는 건설하는 것을 도왔다. 나라를 통과하는 한 번의 여행으로 간디지의 철학과 원칙의 지속적인 인상은 평등과 비폭력의 신념에서 포용과 형제애에 이르기까지 인도 사회의 바로 그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의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지도자의 유산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인도로 돌아가기

1915년 1월 9일, 군중이 모여 간디지와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를 그들의 배인 S.S. 아라비아호가 봄베이(현 뭄바이)의 아폴로 번더에 정박했다. 간디는 친척인 마가넬에게 보낸 편지에서 "봄베이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고 썼다. 열심인 젊은 변호사가 경력 단절을 도모하기 위해 집을 나선 지 거의 22년이 지났고, 지금 돌아온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노련한 사티아그라히였다.

포르반다르

봄베이에서 잠깐의 주문 후에 간디지는 그의 출생지인 포르반다르를 방문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열차를 내리자, 거대한 군중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모든 사람들은 명성을 앞세운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했다. 사람들의 압력은 간디지와 카스투르바가 겨우 자동차에 다다랐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그의 조상들의 고향인 키르티 만디르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200년 된 건물인 키르티 만디르 콤플렉스는 그가 1869년에 태어난 곳이다.

오늘날, 바푸의 발자취와 그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제단이다. 광활한 안마당과 탁 트인 테라스, 철제 격자 창문이 있는 널따란 사각형 모양의 해파리에는 젊은 간디의 회고록과 사진이 장식되어 있다. 그러한 초상화 중 하나는 '7시에 간디지'라는 자막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머리에 둥근 토피(이후로는 간디 토피라고 불렸다)를 머리에 이고, 이마에 틱카(Tikka), 목에 쇠사슬을 매고 있는 떠들썩한 재킷 차림의 소년을 보여준다. 카스투르바 간디의 사진도 여러 장 있고, 두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

1944년 간디지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포르반다르 주민들은 하벨리에 인접한 신전을 지었다. 이 절은 이제 간디지가 사용한 물건들과 정말 오래된 사진들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박물관은 또한 그가 쓴 책이나 그의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 사원은 간디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몇몇 세계 지도자들의 방문을 받아왔다.

라지코트

간디지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인도의 위대하고 다양한 사회 구조의 본질적인 실마리를 이해하기 위해 철도를 통해 나라를 여행하려고 했다. 인도국민회의의 지도자였던 그의 친구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와 약속한 대로, 그는 자신을 '프로브 기간'에 올려놓고, 라즈코트에서 출발하여 디완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여행을 끝냈다. 그의 거주지 카바 간디 노 델로는 오늘날 놓칠 수 없는 유산이다. 힌디와 구자라티 자막을 둘 다 가지고 있는 집의 그림에서 마하트마의 삶을 목격할 수 있다. 이 건물의 구조는 사우라슈트리아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아치형 대문간과 마당을 자랑한다. 간디의 개인 소지품이나 다른 물건들과 같은 많은 유물들도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간디의 핸드룸에 대한 열정은 어린 소녀들에게 바느질과 자수교실을 제공하는 이곳에서 짜는 학교에서 장려된다. 방문객들은 또한 간디지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학교 안에 소장되어 있던 마하트마 간디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베나라스 (바라나시)

1916년 간디지의 '프로브레이션'이 끝난 후 바라나시로 초청되어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의 기초석을 쌓았다. 그곳에서 그가 한 웅변적인 연설은 인도에서 그의 정치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굴욕과 수치심의 문제야.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 나는 이 위대한 대학의 그늘 아래, 성스러운 도시에 있는 나의 동포들에게 나에게 이국적인 언어로 연설하도록 강요당한다.

침묵의 도시가 이러한 굽히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 혁명의 시작과 지도자의 도착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오늘날 위대한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면서 간디의 기운이 거의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후에, 1936년에 간디지는 도시의 중요한 명소인 바르랏 마타 만디르를 취임시켰다. 이 독특한 신전은 바라트 마타(인도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어떤 신이나 여신도 숭배하지 않는다. 이 건물에는 인도의 상징인 바라트 마타(인도의 어머니)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그 디자인은 모든 종교신, 지도자, 자유투사들을 위한 인도의 여신을 나타낸다. 그곳은 또한 평야, 산, 바다를 대표하는 분단되지 않은 인도의 대리석 구조 지리지도도 소장하고 있다.

아마다바드

노벨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만난 산티니케탄(웨스트벵골)에서 잠시 머물다 간디지는 1915년 아메다바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사바르마티 강둑에 사바르마티 아슈람이라는 작은 공동 거주지를 세웠는데, 이것은 영국에 대항하는 그의 비폭력 투쟁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의 아우라는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고 그의 이데올로기와 놀랄만한 삶을 느끼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단디 행진 등 그의 비폭력 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이 간디 스마락 상라할라야(뮤지엄)에 전시됐다. 간디에 관한 문헌 도서관이 있는데 간디가 쓴 편지의 대부분은 종이 스크랩에 보관되어 있다. 이 애쉬람은 히리데이쿤즈와 땅을 공유하고 있다. 즉, 그가 살았던 숙소, 비노바-미라 쿠티르, 게스트하우스, 기도원, 그리고 오두막 산업의 훈련 센터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애쉬램이 세워질 무렵 간디지는 자신의 특징인 도티와 샌들을 신기 시작했다. 곧 방적과 직조의 기술을 터득하고, 카디 생산을 주도하여 선구적인 운동이 되었다. 또 다른 꼭 가봐야 할 곳은 폐면화 찌꺼기를 종이로 만드는 제지공장 칼람 쿠시. 그것은 간디지가 소개한 많은 시골집 산업들 중 하나였다. 오늘날, 그 공장은 어떻게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가 만들어지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매혹적인 방문을 한다.

봄베이 (뭄바이)

간디가 인도에 도착한 순간부터, 약 6개의 민족 운동의 시작을 통해 봄베이는 1917년에서 1934년 사이에 대부분의 활동의 서사시로 남아 있었다. 그의 도시 기지는 2층짜리 수수한 건물인 마니 바반이었다. 1955년 이 역사적 유산은 마하트마 간디를 기리는 기념으로 전환되어 인도의 독립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21년 뭄바이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마하트마 간디가 4일간 단식을 한 것을 목격했다. 간디지가 차르카나 물레바퀴와 결연을 시작한 것은 마니 바반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시민 불복종, 사티아그라하, 스와디, 카디, 킬라파트 운동과 같은 유명한 선동들의 시작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 높은 복도를 걷는 것은 우리를 인도 자유 투쟁 동안에 있었던 정치적 투쟁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박물관의 사진 코너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인도의 역사를 다시 방문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푸네

1942년, 셧 인디아 운동이 시작된 후, 간디지와 카스투르바는 그들의 비서 마하데프 데사이와 함께 푸네의 아가 칸 궁전에서 인턴으로 수감되었다. 1892년 술탄 무함메드 샤 아가 칸 3세가 지은 이 궁전은 바(카스투르바 간디로 애틋하게 알려진 곳)와 데사이 둘 다 심장마비로 죽은 곳이 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기념품들은 아직도 이곳에 서 있다.

오늘날 이 웅장한 건물은 이탈리아 건축물과 조각된 잔디밭을 자랑하며, 현재는 간디 전국기념사업회의 본부가 되었다. 간디지가 차르카 위에서 회전하던 수세미 천연섬유인 하디는 지금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2.5m 길이의 원형 복도는 궁궐 주변부를 운행하며 잘 알려져 있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유운동의 다른 지도자들의 사진과 초상화들이 몇 장 있다; 이것들 중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마하트마가 영국에 대항하여 시위행진을 이끄는 탁상이다. 방문객들은 또한 와르다 마을 8km에 위치한 세이어그램에서 간디지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이 궁전의 다른 하이라이트는 그가 카스투르바 간디와 함께 머물렀던 방과 그의 차르카, 샌들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소지품들이다.

델리
1월의 쌀쌀한 날이었고 78세의 마하트마 간디는 비를라 하우스에서 그의 기도가 열리는 잔디밭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두 손녀딸에게 기대어 부축을 받자 푸른 바지에 카키색 부시 재킷을 입은 젊은이의 환영을 받았다. 잠시 '나마스테'를 한 후 나투람 고드로 인정받게 될 그 남자는 권총을 홱 뽑아들고 간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세 차례나 쏘았다.

국가는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것을 애도했고, 위대한 사마디가 수도 라즈갓에서 그에게 헌정되었다. 국가의 아버지는 1948년 1월 31일 이곳에서 화장되었고,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야무나 강둑에 누워 있는 라즈갓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널브러진 잘 손질된 잔디밭에 둘러싸여 있다. 사마디는 그 남자 자신이 진정으로 반영되어 있고 그가 연상하게 된 소박함을 발산한다. 그의 몸이 불에 탄 벽돌 승강장과 검은 대리석 승강장이 대리석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간디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인 '헤람'이라는 글귀가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그 근처에 영원한 불꽃이 서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고우 휘트먼 전 호주 총리 등 고위 인사들에 의해 풍경에 점점이 찍혀 있는 다양한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으며, 그 이름을 명판에 새기고 있다. 방문객들은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전에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의식은 매주 금요일 열린다. 인근에 간디지 전용 박물관이 두 곳 있다.

비록 그 날이 남자의 마지막을 장식했지만,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전설의 시작을 환영했다.

마하트마의 발자국 (여행 일정표들)

# 제목
유알엘
1 포르반다르-라즈코트-아흐메다바드-바도다라-수라트 여행 일정-1
2 포르반다르-라즈코트-바브나가르-아흐메다바드
여행 일정-2
3 포르반다르-라즈코트-바브나가르-아흐메다바드-수라트
여행 일정-3
4 델리 -자이푸르-아그라-델리
여행 일정-4
5 뭄바이-푸네
여행 일정-5
6 콜카타
여행 일정-6
7 마두라이-칸야쿠마리
여행 일정-7
8 12일 / 11박
여행 일정-8
9 콜카타-비하르
여행 일정-9
10 콜카타-오리사
여행 일정-10
11 델리-심라
여행 일정-11